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伍子胥, ?~기원전 485
이름는 운(員)[1]이고 자서는 인데, 이름보다 자가 훨씬 더 유명하다. [2]
춘추시대 (吳)의 정치가이자 군인.
역사에 길이남을 복수귀, 인생 자체가 무협지인 인물, 아버지와 형을 죽인 초나라 왕실에 끝끝내 복수하는 초특급 근성가이. 웬만한 소설 주인공보다도 더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는데, 모두 엄연히 야사가 아닌 정사에 기록된 사실이라는 것이 흠좀무.

Contents

1 생애
1.1 배경 및 전반기
1.2 복수
1.3 황혼
2 후대의 평가
3 오자서를 다룬 문학작품
4 오자서를 차용한 문학작품

1 생애 

1.1 배경 및 전반기 

오자서의 가문은 대대로 측근에서 (楚)의 국왕을 보필한 명문가였고, 오자서의 아버지 오사(吳奢) 역시 조정의 고관으로서 태자 건의 스승 겸 보좌 역인 태부 벼슬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성왕이 터를 닦고 목왕과 장왕이 그 위에 쌓아올린 강대한 초의 패업도 이 시기에는 저물어가고 있었다. 왕실의 내분은 일상사가 되었고, 어질고 총명한 왕으로 촉망받던 평왕 역시 재위가 길어지면서 점차 간신을 가까이하면서 국정을 소홀히 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왕실의 인척들은 속국들에게 가혹한 뇌물을 요구하고, 부정축재를 일삼는 등 국정을 농단하고 있었다. 나라 밖으로도 초에 적대적인 동쪽 해안 부족들의 국가인 (吳), (越)이 국경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래도 나라를 걱정하는 이들이 없지는 않아 당시까지도 강대국 소리를 듣던 진(秦)의 힘을 빌려 나라를 안정시키려는 계획이 입안되었고, 그 계획에 따라 양국은 초의 태자 건과 진의 공주를 혼인시켜 혼인동맹을 맺는 것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이 와중에 큰 사태가 터졌으니, 바로 며느리 될 진의 공주가 상당한 미인이라, 시아버지인 평왕이 홀딱 반해버린 것이다. 왕의 측근 비무기(費無忌)[3]는 오히려 왕을 부추겨 결국 왕이 며느리를 겁탈하게 만들었다. 대신 태자 건한테는 공주를 따라온 시녀를 공주라고 속여 어찌어찌 혼인을 시켜버렸다.
여기까지만 해도 심각한 국제 문제에 콩가루 집안의 훌륭한 사례인데, 진짜 문제는 평왕과 진의 공주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난 다음 불거졌다. 평왕과 비무기가 태자 건을 죽이고, 후환이 될 지도 모를 태자의 후견인인 오사[4]와 그의 두 아들까지 세트로 제거할 계획까지 도모한 것. 막상 당사자인 태자 건은 별 불만도 없이 시녀와 알콩달콩 애까지 낳고 잘 살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나, 사태가 돌아가는 꼴을 지켜보던 오씨 삼부자도 녹록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결국 오사는 둘째인 오자서에게 태자 건과 그 아들인 왕손 승을 모시고 초를 탈출하도록 하고, 자신은 장남 오상(伍尙)과 함께 남아 초왕에게 처형당하는 쪽을 선택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다르게 표현되는데[5], 초평왕이 아버지인 오사를 먼저 인질로 잡은 후, 아들 둘이 직접 찾아오면 아버지를 살려주겠다는 거짓 편지를 보낸다. 편지를 본 오자서는 평왕이 오씨 삼부자 모두를 죽이려 하는 계략을 알아채고, 형에게 복수를 위해 도망치자고 말하지만, 형인 오상은 아버지에게 가고 오자서만 도망친다.

我知往終不能全父, 然恨父召我以求生而不往, 後不能雪恥, 終爲天下笑耳. 可去矣, 汝能報殺父之讎, 我將歸死. 
내가 가더라도 아버지의 목숨을 보전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아버지가 목숨을 구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는데 가지 않으면 한이 될 것이고, (둘 다 가서) 뒷날 치욕을 씻지 못한다면 종국에는 천하의 비웃음을 들을 것이다. 너는 가거라. 너라면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돌아가 함께 죽겠다.

실제로 꼿꼿하고 꼬장꼬장한 노인네였던 오사는 오자서에게 자신의 복수를 부탁하지도 않았고, 왕을 원망하지도 않았지만, 오자서의 성격을 잘 알았는지 죽으면서 “오자서가 무사히 도망갔으니 초나라는 앞으로 큰 환란을 겪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당연히 평왕은 오자서를 곱게 살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일찍이 문무겸비한데다 강직한 의지의 인물로 소문났는데, 그의 아버지와 형을 죽여놨으니 말 그대로 둘 중 하나가 죽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상황이 된 것. 때문에 자객을 잔뜩 풀어 수색했지만 허탕만 쳤다. 열국지에 따르면 몇몇 자객들이 따라잡았으나 오자서가 죄다 로 쏴 죽여버렸다는데, 그 상황에서 굳이 한 명을 살려 보내면서 “평왕에게 언젠가는 반드시 죽여버리겠다고 전해라”고 불필요한 어그로를 끌어 버리는 바람에 도피 행각이 더욱 고달파졌다고 한다.(…) 이젠 진짜로 죽이지 않으면 후환이 두려울 상황이 되어버렸으니…
탈출한 오자서는 강대국 초와 (晉)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로 명맥을 유지하던 (鄭)으로 향했다. 명재상으로 유명했던 자산이 강력한 외교 카드로 사용 가능한 태자를 비호해 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지만, 오자서가 정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자산은 병사하였고, 재상을 잃은 정의 정국은 혼란상을 거듭하고 있는 상태였다. 결국 정의 혼란은 친 평왕 세력의 집권으로 마무리되었고, 오갈 데 없는 태자 일행에게 집권 세력은 따뜻한 환대를 해주려 했으나 태자는 혼란기의 정을 집어삼키겠다는 되도 않는 야심을 가지고 획책하다가 살해당하여 오자서는 간신히 왕손 승과 단 둘이 목숨만 건져 달아나는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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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서는 고심했다. 초 일족의 복수도 해야 하고,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구해온 왕손 승도 제대로 된 어른으로 키워야 하는데, 뾰족한 방법이 없었던 것. 결국 오자서는 초의 동쪽에서 초의 국경을 위협하고 있는 동방의 신생국가 (吳)에 몸을 의탁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문제는 정에서 오로 가려면 초의 광대한 국토를 북에서 남동쪽으로 완전히 횡단해야 한다는 점.
당시 초-정 국경의 수비대장을 맡고 있던 친구 신포서의 호의로 일단 재입국에는 성공[6]했지만, 돈도 없이 반역죄로 쫓기면서 어린아이까지 딸린 여정이었으니 때로는 사냥꾼으로, 때로는 장강의 뱃사람으로 위장하면서 어렵사리 초-오 국경까지 왔지만 당시 분쟁지역이라 군대가 주둔 중이던 국경을 통과하는 일이 쉬울리는 없었을 터. 이 마지막 관문을 넘는 방법을 고심하느라 하룻밤새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버렸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게다가 오자서는 기골이 장대하고 매우 눈에 띄는 용모였기 때문에 탈출하기가 더 어려웠다.
이 때의 일화 중 한개가 사기에 적혀있는데, 마침내 왕손까지 데리고 초 – 오 국경의 강까지 도주하는데 성공했으나 뒤에서 병사들이 추격해오고 배는 없는 상황에서 한 늙은 사공을 통해 강을 건너고 밥도 얻어먹게 된다. 물론 강 건너에서 군사들이 사공에게 소리를 쳤으나 귀머거리인 척 하고 위장. 이후, 강을 건너게 된 오자서가 감사의 표시로 집안 대대로 물려내려오는 가보인 보검을 사공에게 주려하나 사공은 “지금 오자서란 사람을 잡으면 천금을 준다고 하던데, 그깟 보검을 받아 무엇하겠소?”라고 답하고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오자서는 훗날, 늙은 사공에게 감사라도 하기위해 성함을 물었는데 “당신은 죄인인 것 같고, 나도 죄인을 도운 죄인이 되었으니, 서로 잡히는 일이 생기더라도 모른척 하기위해 그런건 묻지 맙시다.” 라고 짤라 답하였다. 오자서는 그곳에 무릎 꿇어 깊은 감사를 표하고 길을 떠났다.
야사에 따르면 오자서가 사공에게 ‘제가 어디로 갔는지 말하지 말아주십시오.’라고 부탁하자, 사공은 탄식하며 ‘그대가 나를 어찌 못 믿소! 내 목숨을 죽여 그대의 의심을 씻어내겠소’라며 물에 몸을 던져 죽어서, 오자서는 이에 길게 탄식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에, 오자서가 오나라 군사로서, 초나라와 동맹을 맺고있던 정나라를 공격할 때, 늙은 사공의 아들이 사공이 쓰던 노를 가지고 오자서에게 찾아와 정나라에서 군사를 물려주기 청하자 오자서는 “그때 늙은 사공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못 할텐데 어찌 그 은혜를 잊었겠는가, 내 사공의 은혜를 갚기 위해 군사를 물리겠다.” 라고 말하며, 정나라에서 군사를 철수시켰다. 그 후, 사공의 아들은 정나라에서 대대로 대부의 지위에 오르고 그를 어대부(漁大夫)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늙은 어부의 인심이 훗날 나라를 구했습니다.

1.2 복수 

여차저차 오에 도착한 오자서는, 오에서 나름대로 환대를 받는다. 이미 그의 명성이 오에도 널리 알려진 것. 게다가 당시 오는 초와는 견원지간이었으니 초에 크나큰 원한을 품고 있는 오자서는 오에 정착한다. 그리고 조용히 농사일을 하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오도 나라 안이 평안한 상태는 아니었다. 서로 사촌지간인 당시 오왕 요와 왕자 광 사이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 오의 선선대 군주였던 수몽은 똑똑한 막내 계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그러나 막내 계찰은 어리기도 했거니와 왕위에 오를 뜻이 없었던 터라 수몽 사후 일단 맏형 제번이 왕위를 잇게 되었고, 효자인 제번은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부자계승이 아닌 형제계승으로 왕위를 이어가는 식으로 정해놨고 수몽 아래 두 형들도 막내 계찰에게 왕위를 물려주는데 다들 찬성했던 모양이다 . 그런데 당시는 초와 오의 전쟁이 격화되던 시기라서 결국 수몽의 첫째 아들 제번, 둘째 아들 여제가 모두 초와 전쟁에서 전사하자 수몽의 셋째 아들 이매가 왕위에 올랐는데, 막내인 계찰은 그 때까지도 왕위 승계를 극구 사양했던 것. 그렇다보니 이매 사후 다음 왕을 누가 할지가 애매해졌는데 이 때 이매의 사망 후 그 아들인 요가 덥석 왕 자리에 앉아버린 것이다. 혈통으로 따지자면 제번의 장남인 공자 광이 왕이 되어야 하니 광의 입장에서는 억울하다고 할 수 있다. 광은 참고 넘어갔으나…
양 세력을 냉정히 저울질해본 오자서는 야심가에 능력도 출중한 공자 광을 차기 오왕으로 밀기로 마음먹고, 오자서의 협력을 얻은 공자 광은 마침내 쿠데타를 일으켜 요왕을 살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오왕 합려(闔閭)라 자칭하게 된다.[7]
쿠데타의 최대 공신으로 재상 자리에 취임한 오자서는 드디어 본격적인 복수에 돌입했다. 당시 오가 워낙 새롭게 떠오르는 강대국 유망주였던데다가 중원에서도 이름높은 오자서가 대장으로 나서고보니 각국에서 인재들이 와글와글 몰려왔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200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최고의 군략가로 손꼽히는 손자였다. 그 외에도 내정의 명인 백비[8] 등 많은 인재들이 모여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오도 신흥국 때를 벗고 점차 초와 겨룰 만한 국력을 차곡차곡 쌓아나가게 된다.
결국 기원전 506년, 손무와 오자서가 이끄는 오군이 초로 진격을 개시하였다. 이들의 쾌진격 앞에 초군은 그야말로 지옥을 맛보았고, 불과 3개월 만에 수도 코앞까지 적군의 침입을 허용하게 되었다. 당시 초의 수도는 초 문왕 시대에 건설되어 난공불락으로 유명한 영(郢)이었으나 손무의 수공(水攻)에 허무하게 함락, 왕과 몇몇 대신들만 간신히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후 수도에 오군이 입성한 이후에 대규모의 방화와 약탈과 강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오자서의 일가를 몰살시킨 초 평왕과 비무기는 이미 죽은 지 오래였다.[9] 그래서 영성을 함락시킨 오자서는 평왕의 무덤[10]을 찾아가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찾아낸 뒤구리채찍으로 수백 대[11]를 쳐 시체가 형체조차 찾을 수 없게되자[12] 겨우 매질을 그쳤다고 한다. 고인드립 굴묘편시(掘墓鞭屍)의 고사가 여기에서 비롯하였다. [13]
  • 후에도 굴묘편시가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남조의 진나라를 세운 무제 진패선의 무덤인 만안릉 사건이다. 남조의 양나라가 후경의 난으로 거의 몰락하자 장군 한족 출신 진패선과 선비족 출신 왕승변은 각각 군대를 이끌고 후경을 박살내고 권력을 잡는다. 이 둘은 겉으로는 서로 겹사돈을 맺고 의기양양했으나, 속으로는 서로를 해치려고 했다. 그런데 당시 황제였던 원제 소역이 서위의 군대에게 잡혀 죽자 후계를 두고 대립하게 된다. 진패선은 원제의 아홉 번째 아들 소방지를 밀었지만 왕승변은 예전에 동위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사로잡혔던 무제 소연의 조카 소연명, 즉 소방지의 육촌 아저씨를 밀었지만 결국 세력이 더 강한 진패선은 소방지를 즉위시키니 그가 경제가 되었다. 그러자 왕승변은 북제[14]의 군사를 끌어들이려다가 진패선에게 살해당하고 북제의 군대는 양나라의 백성들의 열렬한 지원에 힘입어 패퇴하고 말았다.정해진 형식에 따라 소방지는 진패선에게 선양하니 진패선은 진나라를 세웠다. 일단 진패선은 559년에 재위 3년 만에 병사하고 만안릉에 안장된다. 그러다가 정확히 30년 후인 589년에 일이 터지는데 원래 죽은 왕승변의 가솔은 북제의 투항했는데 북제는 서위의 제위를 얻은 북주에게 멸망했다. 북주는  문제 양견에게 멸망하고 수나라가 589년에 진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할 때 왕승변의 아들 왕반은 장강을 건너와 진패선의 무덤을 파헤쳐 재물을 취하고 관을 부수고 시신을 수백대 매질한 다음 그 시신을 불태우고 그 재를 물에 섞어 마셨다. 섬뜩한 것은 이전에 후경도 이렇게 죽음을 당했다는 것. 어쨌든 현재 옛 진나라의 수도였던 현재 남경 북쪽에 가보면 만안릉 유지가 남아있는데 바로 그 때 왕반이 파헤쳐 놓은 빈 무덤 터다.

초의 수도를 함락시키고 멸망 직전의 상황으로 몰아넣었을 때, 신포서는 산속에서 피난 중 오자서가 초 평왕의 시체에 채찍질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 “아무리 복수라지만 시체 훼손은 차마 못할 짓이 아니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 말에 오자서는 “날이 저물고 길이 멀어서, 거꾸로 걸으며 거꾸로 일을 했소.”라고 답했다. 여기서 유래한 말이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이 부족함을 뜻하는 일모도원(日暮途遠)과, 이치에 벗어난 짓을 뜻하는 도행역시(倒行逆施)다. 그러나 오(吳)도 안심하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간신히 탈출한 초 소왕은 지방에서 게릴라를 조직하여 오군을 괴롭히기 시작했고, 신포서는 서방의 강대국 (秦)에 사신으로 가 원군을 얻어내는 데에도 성공하였다. 이때 신포서는 진왕 앞에서 1주일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고 눈물을 흘리며 군사를 청했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저러다 말겠지 하던 진왕도 신포서의 충심에 감격하여 ‘저 정도의 충신이 있는 나라는 아직 망할때가 안 됐다’며 군사를 내주었다.

본래 오자서의 계획은 함께 망명하였던 왕손 승을 초의 왕위에 앉히고, 자신이 초의 재상에 취임하여 초를 오의 속국으로서 재건하는 것이었으나, 초의 부귀에 맛을 들인 오왕 합려는 초의 본토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그렇게 시간을 끈 탓에 반격을 허용한 것. 결국 초가 오에 막대한 영토를 할양하고, 왕손 승에게 공작 작위를 내려 백공(白公)의 신분으로 초 귀국을 허용하는 선에서 화의를 맺게 되었다.
오자서 밑에서 자라며 보고 배운 탓인지 이 왕손 승도 대단히 집념이 강한 인물이었다. 산책하던 중에 초나라 공실에 어떻게 복수할지 골몰하다가 짚고 있던 지팡이를 거꾸로 쥐어서, 뾰족한 끝에 턱이 찔려 피를 줄줄 흘렸는데도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알아채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결국 왕손은 초나라에 귀국한 뒤 반역을 꾀하다 붙잡혀 처형당한다.

1.3 황혼 

초의 숨통을 끊는 데에는 실패하였으나, 오는 이제 중원 진출을 넘보는 초강대국으로 성장하였다. 더불어 오왕 합려의 자신감도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오와 비슷한 시기에 오의 남쪽에서 일어난 월(越)이 세력을 키우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 오왕 합려는, 오자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월 정벌을 강행하였으나 월의 책략가 범려(范蠡)의 계략에 넘어가 대패, 본인도 큰 부상을 입고 귀환하던 중 끝내 사망하고야 말았다. 당시 합려는 적자가 없었던 터라 후계문제가 불거졌고, 당시 오의 최고 실력자였던 오자서는 합려의 차남인 부차를 지지하여 왕으로 세웠다.
  • 역사서마다 장손이라느니 장남이라느니 등 이야기가 다르다. 또한 이는 부차와 합려의 생몰을 추정해 봤을때 믿기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오강과 태자가 결혼한 뒤, 운우지락을 알지 못하는 나이라 태자비가 요절하고 태자가 오강을 그리워하다 그 뒤를 따랐다는 이야기로 봤을 때, 부차는 차남으로 봄이 더욱 바람직하다.

그러나 이 때 부차를 옹립한 것이 오자서 몰락의 씨앗이 되었으니, 아버지 못지 않게 야심이 컸던 부차는, 아버지의 원한을 갚기 위해 국력을 키우는데 총력을 기울였고, 오자서도 이를 도와 다시 한번 원정길에 올랐다. 실로 압도적인 오군의 전력 앞에 월은 월왕 구천이 부차 앞에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오자서는 월은 쉽게 치료할 수 없는 질병과 같은 존재라 지금 멸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닥친다고 간언했지만[15], 오왕 부차는 오자서의 간언을 듣지 않고 결국 월의 강화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때부터 오자서의 시대도 슬슬 저물어가고 있었다.

강화의 결과로 월왕 구천은 오에 포로로 잡혀왔지만, 온갖 아첨과 뇌물을 총동원하여[16] 오왕 부차의 풀어지게 하는데 성공하여 끝내는 월로 귀환, 오에 대해 복수의 칼을 갈게 되었다. 여기서 구천이 패배의 굴욕을 되새기고자 곰쓸개를 핥았다는 일화와 부차가 원한을 잊지 않고자 땔나무 위에서 잠을 잤다는 일화와 묶어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 한다.
이들의 No.1 타겟은 바로 오자서. 능력도 능력이거니와 월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굽히지 않는 이 노신(老臣)을 제거하지 않고는 오를 뒤엎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월의 범려와 대부 문종은 당시 조정에서 오자서 못지 않은 지위를 갖고 있던 백비에게 많은 뇌물을 갖다바쳐 조정에서 오자서의 영향력을 조금씩 갉아먹는 한편, 오자서를 어려워하던 오왕 부차와 오자서 사이를 이간시키는 데에 전력을 기울였다.
당시 잇다른 승리로 교만해진 오왕 부차는, 중원의 제후들을 소집하여 중원의 패자에 오르겠다는 헛된 야망을 품었고, 이를 반대하는 오자서와 결정적으로 틀어지게 되었다. 그래도 오자서를 자기 손으로 죽이기 꺼림직했던 부차는 제에 말도 안되는 협박장을 써서 오자서에게 들려보냈다. 제의 손으로 오자서를 죽이겠다는 뜻이었으나, 이를 간파하고 있던 제는 오히려 오자서를 융숭히 대접하여 돌려보냈고, 이를 참지 못한 오왕 부차는 결국 오자서에게 명검 촉루(屬鏤)를 내려 자결을 명하였다. 오자서가 오의 멸망을 예감하고 자신의 아들을 제의 유력자인 포씨에게 맡긴 것이 더욱 그의 명줄을 재촉하게 되었다.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던 오자서는 왕에게 ‘내가 죽으면 무덤에다 가래나무를 심어 그 나무로 부차의 관짝을 짜도록 하고 내 을 뽑아 동쪽 성문에 걸어두면 월이 오를 멸망시키는 것을 지켜보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한다. 물론 부차는 이를 가볍게 쌩까고 이런 불충한 자에게 무덤 같은 것도 필요없다면서 그 시체도 가죽부대에 넣어서 장강에 던져버려 저승에서도 결코 편히 쉴 수 없게 만들었다.
이후 월의 신하 범려가, 구천의 오 정벌 성공 이후 문종 등의 공신들을 주살하는 것을 보고는 하야하여 제나라로 건너가고, 오자서의 비극적인 최후를 추모하는 마음에서 치이자피(鴟夷子皮)라고 개명하였다.
과연 오자서의 사후 채 10년이 지나지 않아 오는 월에 의해 멸망당하는 비운을 맛보게 된다. 오가 중원에 패자랍시고 제를 털어버린 후에 한창 패자로 공인받기 위한 회맹을 벌이고 있는데, 이 틈을 노려 월이 오의 수도 고소성에 빈집털이를 감행한 것이 성공한 것이다. 월은 오가 영성을 공략할 때 사용하였던 수공으로 고소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구천은 부차에게 백호의 장으로 봉해준다고 말했으나[17] 오왕 부차는 저승에 가 오자서를 볼 낯이 없다며 거절하고 얼굴을 천으로 가리고 자결한다. 여담이지만 오자서의 최후에 가장 큰 역할을 한 백비는 오나라가 멸망하자마자 구천에게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간신배’ 라는 이유로 공개처형 당했다.
여담이지만 먼훗날 동오의 손침이 오자서의 무덤을 훼손했다. 즉 죽어도 똑같은 일을 반복히 당하고 있다. 그후 손침은 손휴에게 죽었고 손휴도 좀있다가 요절했다.이게 무슨 징크스야? 뭐긴뭐야 오나라의 요절징크스이지!

2 후대의 평가 

복수를 위해 충(忠)을 갈아마신 사람인데다 뒤끝이 좋지 않다보니 유교쪽에서는 평판이 좋지만은 않은 인물. 그러나 워낙 이룬 업적이 업적인데다가 인생역정에 비장미가 넘치다보니 후대에도 그 이름을 널리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신포서를 만났을 때 복수를 위한 집념을 절대 단념하지 않겠다고 한 표현인 일모도원(日暮道遠)[18]은 순리와 역리를 가리지 않는 의지 관철의 위험성을 암시하기도 한다.
사마천은 사기 <오자서전>에서 ‘소의(小義)를 버리고 큰 치욕을 갚아 명성이 후세에 전해졌으며, 모든 고초를 참고 견디며 공명을 이룬 강인한 대장부’라고 평가하였다. 사후 1000년 후 당나라 시대에 영렬왕(英烈王)으로 추존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장쑤성 쑤저우에 그를 기리는 사람들이 세운 사당인 우샹츠(오상사: 伍相祠)가 있다.
열국지에서는 부차에게 죽고 나서도 혼령으로 남아 고소성을 지킨다. 하지만 범려의 설득(우리는 모두 각자의 주군에게 충성하지만 당신은 혼령이고 나는 살아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이기는 법은 없다.)으로 단념하고 저승으로 떠난다. 이후 구천이 백비를 죽이며 “이것은 오자서의 복수다”라고 한다.

3 오자서를 다룬 문학작품 

  • 소설 손자병법(정비석 作)
  • 동주열국지

4 오자서를 차용한 문학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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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員은 보통 원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여기서는 雲과 동음으로 운으로 읽는다.
  • [2] 자로 더욱 널리 알려진 또다른 인물이 관중. 제법 중국사에 빠삭한 사람이 아닌 이상 오자서의 이름인 처럼 이오가 본명인지, 심지어는 그런 본명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의외로 꽤 많다. 당장 중국 춘추시대나 고사성어 좀 알고 계시는 어르신들 및 그런쪽에 풍부한 지식인, 혹은 역덕들에게 관포지교의 유래를 물어봐라. 십중구구에게서 관중이라는 이름을 들을 것이다.
  • [3] 사기 오자서 열전 기준, 다른 기록에서는 비무극(費無極)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오자서의 아버지, 오사 다음가는 태자의 스승이었으나 어디까지나 형식상 자리였고 태자를 직접 가르칠 권한은 없었다.
  • [4] 하지만 비무기 역시 직책은 오사의 벼슬보다 한 단계 아래인 소부였다. 즉 오사와 마찬가지로 태자의 후견인 역할을 맡고 있었던 것.
  • [5] 사기 66권 오자서열전 제6권
  • [6] 이때 오자서가 신포서에게 나는 반드시 초를 엎어버리고 말테다.라고 말하자, 신포서는 그렇다면 나는 반드시 초를 지키고 말테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래에 나오듯이 훗날 두 사람 다 자신의 말을 지켰다.
  • [7] 쿠데타의 자세한 내막은 어장 항목 참조
  • [8] 오자서와 비슷한 처지로, 초의 중신인 백주리의 손자인 명문가 후손이었으나 비무기의 참소로 조부 이하 모든 일가가 멸족당하고 홀로 탈출해 오로 귀순했다. 이 때 어떤 사람이 백비는 믿을만한 사람이 못된다고 말했으나 오자서는 자신과 같은 처지인 백비와 자신은 잘 맞는다고 귀담아듣지 않았다. 여기서 나온 말이 동병상련이다. 능력있는 인재였지만 물욕이 심해 훗날 월의 뇌물공세의 공략대상이 되고, 오자서와 크게 대립하게 되어 결국 오자서와 오의 몰락의 원인이 된다.
  • [9] 연전연패로 초나라 백성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자 영윤 낭와는 비무기를 역적으로 몰아 그 집안을 멸족시켰다. 이때 백성들이 좋아하면서 침을 뱉었다고 나온 바 있다.
  • [10] 다른 이야기에서는 기껏 무덤을 찾았더니 도굴 방지용 가짜 무덤이라 오자서는 이를 갈며 분통해했는데, 소문을 듣고 어느 노인이 찾아와 진짜 평왕의 무덤을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병사들을 시켜 무덤을 파내고 시체를 아주 박살낸 오자서가 비로소 노인에게 ‘노인장은 어찌하여 무덤 위치를 아는 거요?’ 질문하자 자신은 노역으로 끌려와 무덤을 만들던 장인인데 무덤을 다 만들고 나니 낌새가 안 좋아 겨우 달아나 목숨은 구했지만 친구와 이웃, 동료들 대다수 무덤 노역에 동원된 이들은 무덤의 비밀을 지키고자 학살당했다는 것이었다. 늙은이 주제에 큰 보물은 필요없고 억울하게 죽어간 그들을 기리는 작은 사당이라도 짓고 싶다면서 그 부탁할 겸 찾아와 무덤 위치를 가르쳐주었다고 하자 오자서는 한숨을 쉬며 ‘평왕 그놈이 여기에도 원한을 남겼구나!’ 탄식하였고 노인에게 후한 재물로 보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비석의 소설 손자병법에선 아무리 자신의 동료들을 죽인 왕이지만 그래도 그 왕의 시체를 채찍질하겠다는 말을 오자서에게서 듣고 도의를 저버린 자를 도왔다고 생각하며 연못에 몸을 던져 죽었다.
  • [11] 사기 오자서 열전에는 300대로 기록되어 있다.
  • [12] 십팔사략에선 평왕의 시체는 수은을 칠해서 그다지 썩지 않았기에 오자서는 더 기뻐하며 두 눈을 후벼파고 채찍으로 때렸다고 한다.
  • [13] 이 일 때문에 초나라에는 시신을 포함해 왕의 몸에 해를 끼치면 처형하는 법이 생겼고, 오기가 최후의 무승부를 띄우는데도 일조하였다.
  • [14] 동위의 제위를 찬탈 선양하고 세운 나라
  • [15] 여기서 유래한 고사가 심복지환(心腹之患)이다.
  • [16] 이 때 부차의 똥맛을 보면서 건강을 살펴주었고 미녀, 서시를 바쳤다. 중국 4대 미녀로 꼽히는 유명한 서시가 이 때 등장한다.
  • [17] 호는 가정을 세는 단위. 즉 100가구 정도 동네의 이장 자리로 만족하라는 뜻이다. 이 말은 당신은 왕 노릇 할 자격이 없어라는 말을 돌려서 표현한 것. 부끄러움을 아는 자에게는 사형선고와 다를 것이 없다.
  • [18] 날은 저무는데 갈 길은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