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시대 제나라 재상 관중은 올곧고 변함없는 ‘충성’의 화신이었다. 그런 관중이 죽을 병에 들자 마음이 급해진 임금 환공은 각별히 유의해야 할 점을 말해달라고 부탁한다. 관중은 “아들을 삶아 바친 역아, 스스로를 거세한 수조를 특히 조심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왕을 위한다는 명분하에 끔찍한 일도 불사하는 이들은 근본이 악할 수 있고, 결국 나라를 위험에 처하게 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조언을 따르지 않은 환공은 수조와 역아에게 갇혀 굶어 죽고 두 달 만에 시체로 발견된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항우 밑에서 한직으로 돌던 한신은 유방의 수하가 돼선 승승장구했다. 초나라의 제후 자리를 꿰차게 됐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자신을 따라온 항우의 장수 종리매의 목을 유방에게 바치는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더 큰 권세를 도모한다. 그러나 오히려 민심을 잃고, 자신도 참살당한다. 토사구팽이란 말의 기원이다.

충 성의 상징인 원탁의 기사 랜슬롯이나 북유럽 신화의 영웅 지그문트도 끝까지 충성을 바치거나 받을 대상이 주위엔 없었다. ‘충성’의 마음은 사랑, 미움, 두려움, 기쁨 등의 순수한 감정과 달리 계산과 계획이 개입될 수밖에 없어 더 복잡하다. 돈 많고 힘센 형님에게 목숨을 바치는 좀 모자란 건달들과 달리 대부분은 과연 누구에게 충성을 바쳐야 할지 손익계산을 한다. 당연히 배신이라는 결말을 볼 때도 많다. 어떤 인간도 완벽하게 도덕적이며 투명할 수는 없으니 서로에 대한 의심에서 자유롭지 못한 탓이다.

콘 비츠(Milton R. Konvitz) 같은 철학자들은 그래서 충성의 대상을 사람보다는 원칙, 이념, 종교, 국가, 정부 등으로 확장하는 게 낫다고 말한다. 오직 한 파트너에게 집중하게 만드는 ‘사랑’의 감정과 달리 ‘충성’은 그 대상도 다층적이라 딜레마에 빠지게 만들기도 한다. 예컨대 한국계 미국인은 미국과 한국의 축구경기 때 누구를 응원할까. 친일파 자손이 조상의 친일행적을 미화해 가문에 충성하는 것은 국가에는 불충한 행위다. 피는 물보다 진해 추상적인 대상보다는 개인적인 관계에 따라 충성의 순위가 정해지기 십상이라 충성이 꼭 윤리적으로 옳지만도 않다.

이 른바 항명파동, 내부자 고발 등으로 검찰, 경찰?군 등이 시끄럽다. 조직 안에서 남들 모르게 결정돼야 할 사항들이 외부에 노출돼 창피하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어떤 조직의 결정이든 투명하게 진행된다면 제3자의 입장에서 오히려 반가운 일이 아닐까. 검사동일체니, 상명하복이니, 음지를 지향해야 한다는 과거의 구호로 정치적 편향성이 다른 구성원들을 소리 없이 제거하는 공포 상황보다는 나아 보인다. 사고가 나기 전에 호루라기를 부는 사람이 있어야 시끄러워도 더 큰 재앙을 예방한다. 절대 싸우지 않는다는 부부, 철저하게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는 자녀들의 실상은 때론 공포영화보다 더 무섭다. 갈등으로 시끄럽다는 것은 구성원이 다른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특정인을 위하는 후진적 충성은 기회주의자의 아첨일 뿐이다. 권력과 돈보다는 고귀한 도덕원칙을 위해 명예롭게 사는 것이 진짜 아름다운 충성이다.

이나미 정신과 전문의 융 분석심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