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대통령이나 장관을 지내면 죽을 때까지 ‘대통령님’ ‘장관님’으로 대접받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아버지 부시’ 조지 H W 부시는 달랐다. 클린턴 대통령 시절인 1994년 중동에서 국제행사가 열려 전임 대통령 부시가 미국을 대표해 참석했다. 수행한 클린턴 정부 백악관 관리는 여러 사람 있는 데서 부시를 꼬박꼬박 ‘대통령’이라고 불렀다. 그러자 부시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전직, 전직, 전직(Ex, ex, ex)!” ‘대통령’ 앞에 전(前) 자를 붙이라는 호통이었다. 권력이 손에서 떠났으면 모든 것을 깨끗이 정리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부시가 88년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선출됐을 때 그의 연설 솜씨가 도마에 올랐다. 전임 레이건에 비해 부시에겐 언변도 카리스마도 없었다. 부시도 자기 약점을 알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웅변만으로는 땅속에서 석유를 캘 수 없습니다.” 부시는 텍사스에서 석유사업으로 성공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귀에 솔깃한 말솜씨보다는 무언가를 이뤄내는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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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 성적표에서 부시는 링컨·워싱턴·루스벨트·케네디같이 상위 그룹에 끼지 못한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는 부시의 미덕이 있다. 그가 성실하고 정직했으며 사적(私的) 이익을 공공 이익보다 앞세우지 않았다는 점이다. 부시는 “사회를 살맛 나게 하는 데엔 정부 정책만큼 개개인의 자선과 봉사활동 같은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어제 아침 신문에 실린 부시의 사진 한 장이 여러 사람 가슴을 훈훈하게 덥혀줬다. 여든아홉 살 부시가 머리를 빡빡 민 채 역시 까까머리인 두 살배기 사내아이를 안고 웃는 사진이다. 아이 패트릭은 부시가 대통령이었을 때 그를 모셨던 비밀 경호원의 아들이다. 패트릭이 백혈병에 걸려 치료받으면서 머리카락이 모두 빠지자 아빠의 옛 동료 경호대원들이 함께 삭발하고 투병을 돕는 모금에 나섰다. 그들의 보스였던 전직 대통령이 모금에 힘을 보태고 아이에게 용기를 주려고 머리를 깎은 것이다.

▶사진 속 부시는 영락없이 마음씨 좋은 동네 할아버지다. 해군 조종사 출신 부시가 여든다섯에 3200m 상공에서 스카이다이빙을 하자 부인 바버라는 “우리 부시, 언제 철드나”라고 했다 한다. 전직 대통령들이 불행한 최후를 맞거나 정쟁(政爭)의 대상이 되고 숨겨둔 재산 때문에 압수수색까지 당하는 우리 경우를 생각하게 된다. 국민의 사랑과 박수를 받으며 이웃처럼 편안하게 어우러지는 전직 대통령을 우리는 언제쯤 보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