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의 작가 박경리가 작년 5월 세상을 떠나면서 유작으로 남긴 시가 있다. 그 시 중에는 자기가 힘들 때 중국 ‘사기(史記)’의 작가인 사마천(司馬遷)을 생각하면서 글을 썼다는 구절이 있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거운 밤에는/ 이 세상 끝으로 온 것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옛날의 그집’ 중에서)

한나라 시대의 사관인 사마천은 젊었을 때 자기의 친구를 변호했다가 임금이 격노하여 그의 고환을 거세해 버렸다. 그런데도 그는 발분하여 상고시대에서 한대에 이르는 2000년 역사를 끝내 완성하고 한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그렇게 쓴 ‘사기’는 중국의 고전 중에서 가장 독자가 많은 사서임은 물론이고, 동아시아를 비롯하여 세계 사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대하사서이다.

중국의 문인들은 사마천의 좌우명인 "어떤 사람의 죽음은 태산처럼 거룩하고 어떤 사람의 죽음은 깃털처럼 가볍다"란 말을 자주 인용한다. 사마천은 여기서 한 인간의 ‘죽음’이 갖는 의의를 ‘태산’과 ‘깃털’로 양분하고 있다.

필자가 직접 겪었던 중국 문화대혁명 때 일이 생각난다. 모택동과 4인방의 비호하에 무소불위하던 홍위병들은 그때의 국가주석(대통령에 준하는 직위임) 류소기를 가죽벨트로 사정없이 구타하여 그가 결국은 타박상으로 죽었고 중공군의 창건자인 하룡 원수는 홍위병들이 고의적으로 음식을 주지 않아 굶어 죽었다. 그 외에도 형언할 수 없는 갖은 학대를 받은 세계적인 학자와 과학자, 그리고 작가와 예술가들은 부지기수이다.

그러나 그들이 절대로 자살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아 오늘의 개혁 개방 시기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마천의 위에서 말한 좌우명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죽으려면 조용히 죽든가, 혹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한 목숨 바치든가 하는 것이 문인 된 도리요, 만약 일신의 심신이 고달프다고 자살하는 것은 깃털 죽음에 불과한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만약에 그때 자살을 현실 회피의 한 방편으로 선택해도 좋다는 문화가 중국에 있었다면 추호도 과장 없이 적어도 수백만은 자살했을 것이다.

중국 남송시대의 문천상(文天祥)이란 민족영웅은 원나라 침략군에게 포로가 되어 토굴 속에서 옥고를 치르면서도 변절하지 않고 "인간이라면 죽기 마련 아닌가? 일편단심으로 역사에 남으리"라는 유서를 남기고 의사하였다. 그런데 사람 사는 곳이라면 사람들의 귀감이 되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불행과 불우 속에서 완강히 분발하는 사람들이다. 박경리도 그랬다. 남편 사별, 아들 사망, 사위 옥고… 그래서 박경리 당신의 말을 빌리면 "슬프고 고통스러워 문학에 몰입하였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을 보면 굴원의 ‘이소’는 쫓겨 다닐 때 썼고, 좌구명은 장인이 된 후에 ‘국어’를 썼으며, 다리가 절단된 손자는 발분하여 ‘손자병법’을 썼고, ‘여씨춘추’는 여불위가 좌천되자 썼고, 한비는 영어(囹圄)의 몸이 된 후에 ‘세난’과 ‘고분’을 썼다.

이처럼 가슴속의 울분이 있으면 그것을 발산시키기 위해 나라의 미래와 민족의 후세를 위해서 좋은 글이나 업적을 남기는, 그러한 민족이야말로 무궁무진한 미래가 있는 민족이 아닌가 생각된다. 요즘도 어린이들에게 장래 희망이 뭐냐고 물었을 때 "커서 대통령이 되겠다"는 대답이 있는지 궁금하다. 적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그런 대답 하지 마라" 하고 말리고 싶다. 대통령까지 지내신 분도 수틀린다고 자살을 할 수 있다니 그것마저 따라 배울까 걱정이 된다.